주치 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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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치 카사르는 칭기즈 칸의 동복 형제이자 몽골 제국 건국에 기여한 인물이다. 예수게이의 아들로, 칭기즈 칸의 신뢰를 받아 군사 행동 결정에 참여했으며, 나이만 정복전 등에서 공을 세웠다. 몽골 제국 성립 후 좌익을 맡아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정복했다. 칭기즈 칸과의 정치적 갈등, 타타르 부족 관련 사건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몽골 제국과 원나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현대 몽골 부족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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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 카사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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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원어 이름 | |Jöči Qasar}} |
다른 이름 | 조치 카사르 주치 카사르 조치 카사르 (|Jöči Qasar}}) 조치 카사르 (}}), |
별칭 | 카사르 (}}, ) |
작위 | 작위 정보 없음 |
생애 | |
출생일 | 1164년 |
사망일 | 1219년 |
가문 | |
왕조 | 몽골 제국 |
가문 | 보르지긴 가문 |
아버지 | 예수게이 |
어머니 | 호엘룬 |
종교 | 텡그리 신앙 |
2. 생애
주치 카사르는 카묵 몽골의 보르지긴 씨족 중 키야트부족의 부족장인 예수게이와 그의 아내 호엘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훗날 칭기즈 칸이 된 테무진보다 2살 어렸다. 카사르는 몽골 부족장 예수게이와 호엘룬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형 테무진(칭기즈 칸)과 함께 역경을 이겨내며 성장했다.
1217년에 박수무당 텝 텡그리가 카사르가 불충하다고 고발하자 호엘룬을 비롯한 친지들이 카사르를 변호했다. 샤머니즘 세력이 군주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칭기즈 칸은 카사르와 테무게를 시켜 텝 텡그리를 씨름을 빙자하여 죽였다.
칭기즈 칸은 자신의 아들들에게는 정복한 우익의 영토를 공평하게 분배했지만, 좌익의 경우 막내동생 테무게가 칭기즈 칸의 편애를 받았다. 그래서 카사르와 하치운의 울루스(영지)는 테무게의 울루스보다 훨씬 작았다.
1219년 카사르는 칭기즈 칸이 타타르 남성 1천 명을 전부 살해하라고 명령했으나, 이를 어기고 자신의 아내와 휘하에 살려두었다. 칭기즈 칸이 타타르 부족 중 가장 큰 세력인 토토크리우트 타타르 씨족을 토벌했을 때, 칭기즈 칸은 오랜 원한으로 인해 족멸하라는 엄명을 내렸지만, 조치 카사르는 칭기즈 칸의 세 번째 황후 예수겐과 다섯 번째 황후 예술룬 자매, 그리고 자신의 아내도 동족 출신이었으며, 아내의 간청을 받아들여 타타르 부족의 부녀자들을 몰래 도와 포로로 분배되어 처형이 결정되었던 천 명의 장수 중 학살을 절반인 500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500명을 숨겼다. 훗날 이것이 발각되어 칭기즈 칸은 격노했다고 한다. 한편 옹기라트부가 몽골에 사절을 보내자 카사르는 사절을 간첩으로 오해하여 공격했는데, 이 일로 옹기라트가 자무카와 연합한 일이 있다. 칭기즈 칸은 이를 계기로 카사르를 체포, 처형하려 했으나 어머니 호엘룬이 칭기즈 칸의 막사를 찾아가 자신의 가슴을 드러내며, 형제를 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칭기즈 칸은 카사르를 죽이지 않고 체포했다가 풀어주고, 대신 카사르의 영지 대부분을 몰수하고 1천 4백 호의 가구만 남겨두었다.
키야트 씨족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형 칭기즈 칸과 대립하는 경우도 있었던 듯하며, 『원조비사』에 따르면 1206년 칭기즈 칸의 제2차 즉위 이후 샤먼(무당) 코코추 테프텡그리 등 콩고탄 씨족의 자제들에 의한 쿠데타 계획에 가담한 것을 죄로 다스려 국정의 중추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일설에는 주치 카사르는 칭기즈 칸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후일 멀런 칸이 하르친부의 우네발라드 왕에게 암살당했는데, 몽골 황금사에 의하면 우네발라드 왕은 그의 원한으로 멀런 칸을 죽였다고 한다. 사망 년도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2. 1. 어린 시절
카마그 몽골의 보르지긴 씨족 중 키야트부족의 부족장인 예수게이와 그의 아내 호엘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후일의 칭기즈 칸이 된 테무진보다 2살 어렸다. 정확한 생일은 전하지 않는다. 본명은 주치인데, 카사르는 중세 몽골어로 용맹하다는 뜻과 일종의 맹견(猛犬)이라는 뜻이 있다. 테무진의 첫 아들 주치와 이름이 비슷해 중국계 사서에서는 다른 한자로 번역하게 된다.[3]1171년 예수게이가 타타르에게 독살당하자 몽골부를 장악한 타이치우드 씨족의 타르구타이 쿠릴투크는 예수게이의 처자식을 부족에서 내쳤다. 1176년 예수게이 일가가 떠돌이 생활을 하는 와중, 예수게이의 서장자(테무진과 카사르의 이복형) 벡테르가 식량을 빼돌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테무진과 카사르는 벡테르의 앞뒤에서 활을 쏘아 죽여 버렸다.[1]
2. 2. 몽골 제국 건국
1171년 예수게이가 타타르에게 독살당한 후, 몽골부를 장악한 타이치우드 씨족은 예수게이의 가족을 부족에서 추방했다.[3] 1176년 예수게이 일가가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 이복형 벡테르가 식량을 빼돌리자 테무진(훗날의 칭기즈 칸)과 카사르는 벡테르를 활로 쏘아 죽였다.[1]1203년 칼라칼지드 사구 전투에서 테무진이 이끄는 보르지긴 씨족이 자무카의 자다란 씨족에게 크게 패했을 때, 카사르는 아들들과 부하 몇 명과 함께 숲 속에 숨어 지냈다. 이후 테무진은 몽골족들 사이에서 새로운 지지자들을 모았고, 카사르의 항복을 가장한 가짜 메시지로 옹 칸을 속여 케레이트를 격파했다.
어린 시절부터 카사르는 형 테무진을 도와 몽골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1199년 나이만 정벌에서 큰 공을 세웠고, 1204년 나이만 정복전에서는 중군을 맡을 정도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8] 칭기즈 칸은 카사르를 깊이 신뢰하여 군사 행동을 결정하기 전에 그와 상의하기도 했다.[7]
2. 3. 몽골 제국의 확장
1206년 칭기즈 칸이 몽골 제국을 세운 후, 동복형제인 주치 카사르에게 좌익(오늘날의 내몽골 자치구 동쪽 끝 부분)을 맡겼다. 카사르는 만주와 한반도 접경 지역을 정복했다.[4] 카사르에게는 현 내몽골 자치구의 후룬베이얼시 일대의 영지와 4천 호의 가구가 주어졌다.1215년, 몽골군이 금의 수도 중도를 함락시킨 후 주치 카사르는 형의 명에 따라 북경성(대정부)을 공략했다. 더 북상하여 여진의 부카누(포선만노)를 복속시켰다.
3. 칭기즈 칸과의 관계
칭기즈 칸은 카사르를 깊이 신뢰하여 군사 행동을 결정할 때 상의하곤 했다.[7] 1199년 나이만 출병에서 나이만 군에 대승하여 공을 세웠고, 1204년 나이만 정복전에서는 중군(콜 Qol)을 맡을 정도로 그 전력을 높이 평가받았다.[8]
칭기즈 칸이 타타르 부족을 토벌할 때, 족멸하라는 엄명에도 불구하고 카사르는 칭기즈 칸의 황후 예스겐과 예술룬 자매, 그리고 자신의 아내가 타타르 부족 출신이었기에 아내의 간청을 받아들여 타타르 부족의 부녀자들을 몰래 도왔다. 포로로 분배되어 처형될 예정이었던 천 명의 장수 중 절반인 500명만 학살하고 나머지는 숨겨주었다. 훗날 이 사실이 발각되어 칭기즈 칸은 크게 분노했다.
1206년 칭기즈 칸의 즉위 이후 샤먼 코코추 테프텡그리 등 콩고탄 씨족 자제들에 의한 쿠데타 계획에 가담한 죄로 국정의 중추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칭기즈 칸은 샤머니즘 세력이 군주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카사르와 테무게를 시켜 텝 텡그리를 씨름을 빙자하여 죽였다.
일설에는 칭기즈 칸에 의한 분봉 시, 다른 동생들(울루스)(카치운 가문, 오치긴 가문)에 비해 카사르 가문의 울루스에 대한 분봉이 압도적으로 적었던 것은 칭기즈 칸과 카사르의 정치적 대립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한다.[9]
4. 군사적 업적
주치 카사르는 뛰어난 궁술 실력을 바탕으로 몽골군의 주요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몽골비사』와 『알탄 토브치』등의 기록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형 칭기즈 칸보다 키가 크고 건장하여 강한 활을 당겼기 때문에 "강궁을 당기는 카사르"(하부투 카사르 Qabutu Qasar)라고 불렸다고 한다. 『집사』에서는 "카사르"는 "용맹한"이라는 의미이며, 괴력의 소유자이자 위엄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원사』에서는 칭기즈 칸이 "별리구타이의 힘, 카사르의 활 솜씨"가 있었기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으며, 조치 카사르는 궁술의 명수로 알려져 있었다.[4]
1203년 칼라칼지드 사구 전투에서 테무진(칭기즈 칸)의 보르지긴 씨족이 자무카의 자다란 씨족에게 대패했을 때, 카사르는 아들들과 부하 몇 명과 함께 숲 속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
1206년 몽골 고원을 통일한 칭기즈 칸은 동복형제인 카사르, 하치운, 테무게에게 좌익(오늘날의 내몽골 자치구 동쪽 끝 부분)을 맡겼다. 카사르는 훗날 만주라고 불리게 되는 중국 동북부의 땅과 한반도 접경을 정복했다.[4]
5. 성격 및 평가
'카사르'라는 이름은 중세 몽골어로 용맹하다는 뜻이며, 일종의 맹견(猛犬)을 의미하기도 한다. 『집사』에서는 카사르가 용맹하고 괴력의 소유자이자 위엄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으로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1] 칭기즈 칸은 "별리구타이의 힘, 카사르의 활 솜씨" 덕분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으며, 조치 카사르는 궁술의 명수로 알려져 있었다.[1]
『에르데니인 토브치(몽골 비사)』, 『알탄 토브치』 등 후대 전설에 따르면, 조치 카사르는 어린 시절부터 형 칭기즈보다 키가 크고 건장했으며 강한 활을 당겼기에 "강궁을 당기는 카사르"(하부투 카사르 Qabutu Qasar) 등으로 불렸다.[1] 전설에서는 그가 이를 자랑하다가 노인으로 변장한 칭기즈에게 자만심을 꺾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
6. 후손
칭기즈 칸의 동생 주치 카사르의 후손들은 몽골 제국과 원나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카사르의 후손 중 일부는 원나라 때 뇌천왕(淄川王), 제왕(齊王) 등의 작위를 받았다.[6]
카사르 가문은 잘라이르, 콩기라트, 이키레스, 우루드, 망구드 등 다섯 개의 강력한 씨족과 협력했으며, 보통 테무게 가문의 왕자들이 이들을 이끌었다. 아릭 부카의 반란 당시에는 테무게의 손자인 타아차르의 지휘 아래 쿠빌라이를 지지했다.
카사르의 아들 예순게는 '예순게 기공비(구 칭기스 스톤)'에 활 솜씨가 기록될 정도로 유명했다. 예순게의 가계는 카사르 가문에서 가장 번성했다.
원나라 말기부터 15세기 중반까지 카사르 가문 왕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중국에서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발생한 혼란 때문에 명확하지 않다. 17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 편찬된 몽골 연대기에는 카사르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역사가들은 대부분 비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특히, 메르겐 게겐의 ''알탄 토브치''(루브산단진의 ''알탄 토브치''와 혼동하지 말 것)는 카사르 가문의 후손이었던 저자 자신이 카사르 가문의 왕자들의 영향력을 과장했다.[5]
오이라트의 통치자 에센 타이시는 1446년 호르친의 집단을 몽골 서부로 추방했고, 그들은 호슈드가 되었다.[5]
6. 1. 카사르 울루스
카사르의 울루스(사람과 영토)는 테무게의 울루스보다 훨씬 작았다. 카사르의 원래 영토는 싱안 산맥 서쪽에 위치했으며, 에르구네 강과 하이라르 강, 쿨룬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4] 중국 정복 이후, 카사르 가문의 왕자들은 산둥성과 장시성에 최소 두 개의 추가 영토를 소유했다.[4]6. 2. 주요 후손
- '''주치 카사르'''(J̌öči Qasar, 搠只哈撒児/جوچى قسار Jūchī Qasār)
- * 자천왕 예구 (Yegü, 淄川王也古/ییگو Yīgū): 조치 카사르의 장남으로, 카사르 울루스를 계승했다.
- ** 코르코순 (Qorqosun, 火児哈孫/ارقسون Ārqasūn): 예구의 아들이다. 《원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집사》에서는 예구의 뒤를 이어 카사르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고 한다.
- * 토크 대왕 (Toqu, 脱忽大王/توقو Tūqū): 조치 카사르의 아들이다.
- ** 에브겐 (Ebügen, 愛哥阿不干王/ابوگان Ābgān): 《집사》에서는 토크의 아들로 기록되었지만, 《원사》에서는 예구의 아들 아이거 아부간왕으로 기록되었다.
- * 예순게 대왕 (Yesüngge, 移相哥大王/ییسونگگه Yīsūngge): 조치 카사르의 아들로, 예구와 코르코순에 이어 카사르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뛰어난 궁술로 유명하며, '예순게 기공비(칭기즈 칸 스톤)'에 그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12]
- ** 친왕 에센 에무겐 (Esen emügen, 親王愛仙阿木干/امگان Āmgān): 《원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집사》와 "정주로 총관 녜구타이 공 묘지명"에서는 예순게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시크두르 왕 (Šikdür, 勢都児王/شیکتور Shīktūr): 에센 에무겐의 아들이다.
* 제왕 바부샤 (Babuša, 斉王八不沙/مامیشا Māmīshā): 시크두르의 아들이다. 원나라 때 제왕(齊王) 작위를 받았다.[6] 바부샤까지는 《집사》에도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 비리그 대왕 (Birigü, 必烈虎大王): 시크두르의 아들
* 콩고르 왕 (Qong'ur, 黄兀児王): 시크두르의 아들
** 바이 테무르 (Bai Temür, 伯帖木児王): 콩고르의 아들
** 제왕 올크 테무르 (Ürüg Temür, 斉王玉龍帖木児): 콩고르의 아들로, 천력의 난에서 상도를 함락시키는 공적을 세웠다.
** 베르케 테무르 (Berke Temür, 別児帖木児王): 콩고르의 아들
- '''토가 테무르'''(Togha Temür, طغا تيمور/Tughāy Tīmūr): 14세기 중반 일 칸국의 왕위를 주장한 인물이다.
《집사》에서는 조치 카사르에게 《원사》에는 기재되지 않은 막다르(Maqldar)와 카랄추(Qaralchu)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고 추가로 기록하고 있다.
6. 3. 현대 몽골 부족으로의 계승
카사르의 후손들은 현대 몽골의 여러 부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호르친부, 골로스부, 돌베트부, 자라이트부 등이 카사르의 후손으로부터 기원했다.[6] 특히 호르친부는 카사르의 후손인 볼나이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볼루나이는 1463년, 1467년, 1470년의 중국 자료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로, 몽골 연대기에 따르면 그의 형제 우누볼드가 칭기즈 칸의 이복 형제 벨구테이의 후손을 죽였다고 한다.볼루나이가 이끈 호르친 몽골족의 후손들은 청나라의 행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지림 동맹의 호르친, 잘라이드, 도르베드, 고를로스, 주 우다 동맹의 아루 호르친, 울란차브 동맹의 도르벤 헤헤드, 무 밍간, 우라드 등이 그 예이다. 특히 호르친 왕자들은 만주족의 아이신 기오로 황실과 초기부터 혼인 관계를 맺고, 청나라 시대 내내 최고위 왕자 칭호(''호쇼이 친 왕'')를 보유했다.
도르베드는 1624년 헤이룽장으로 청나라에 항복했고, 카사르의 후손들이 다스리는 지림 동맹에서 깃발로 조직되었다. 고를로스 기 역시 카사르의 후손들이 다스렸다.
일부 학자들은 아프가니스탄의 하자라족 또한 카사르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한다. 14세기 중반 토가 테무르가 사르바다르에게 살해된 후, 카사르 씨족의 생존자들이 아프가니스탄 산악 지역으로 도망쳐 그들의 씨족명을 유지했고, 이것이 '하자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하자라족은 자신들의 기록된 역사가 없지만, 이 가설은 "천"을 의미하는 페르시아어 단어에서 하자라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7. 기타
그의 조카 주치와의 구별을 위해 중국계 사서에서는 주치를 술적(述赤)으로, 카사르는 술척(拙赤)이나 카사르로 기록하였다.
참조
[1]
서적
The history of Mongolia
Global Oriental
2010
[2]
서적
Rashiduddin Fazlullah's Jami'ut Tawarikh: Compendium of Chronicles, A History of the Mongols, Part One
Department of Near Eastern Languages and Civilizations, Harvard University
[3]
서적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a mongolian epic chronicle of the thirteenth century
Brill
2006
[4]
서적
A History of Inner Asia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02-17
[5]
서적
Encyclopedia of Mongolia and the Mongol Empire
[6]
서적
清史稿
[7]
서적
2013
[8]
서적
2013
[9]
서적
2013
[10]
서적
2013
[11]
서적
1970
[12]
서적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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